매년 열리는 시협 정기세미나와 협회에서 주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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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랑 생명사랑 시사랑 캠페인 방송 작품

제목 공개방송 : 이문재, 허영자 시인 / 가수 홍대광 / 피아니스트 소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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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잠 못 이루는 밤

 

허영자

 

이슬 구르는 연잎 위에

조그만 새끼 청개구리

잠들어 있을까

 

겹겹 두른 배춧잎 속에

파아란 배추 애벌레

잠들어 있을까

 

야위어 앙상한 르완다의 어린이

허리 꼬부려 누더기 속에

잠들어 있을까

 

켜켜이 쌓이는 어둠

시름 깊은 층계 아래

아아

잠 못 이루는 이 캄캄한 밤.


*
-2부-


손녀

 

허영자

 

주름진 내 볼에

입 맞추는 네가 있어

행복하다

 

느린 내 걸음에

발맞추는 네가 있어

행복하다

 

초췌한 내 모습에도

할머니 멋지다

치켜세우는 네가 있어

행복하다

 

내려쬐는 땡볕 속

서늘한 나무 그늘

고단한 내 길 위의

아늑한 쉼터

 

귀여운 아가야

네가 있어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

대가족

 

이문재

 

돌아오는 금요일이

아버지 기일

올해로 스물일곱해째

그러고 보니 돌아가시고 나서도

매년 꼬박꼬박 나이를 드신다

살아서 팔십 돌아가시고 나서 스물일곱

 

그러고 보니 죽은 자에겐

죽은 그날이 두 번째 생일이다

죽음이 새로 살기 시작한 첫날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기억한다면

기일은 엄연한 생일이다

 

아버지가 꼭 그렇다

돌아가시고 나서 더 자주 오신다

당신 제삿날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큰 형님 큰 형수 제삿날

설과 추석에는 며칠 전부터 안방 차지

내 생일 아침에도 큰 기침을 하신다

 

아이들 졸업식에는 물론

친척들 장례식과 결혼식장

명퇴 전 날에는 회사 앞 단골술집

어젯밤에는 사나운 꿈자리에까지

아버지 안 가시고 자주 오신다

올해로 백일곱 참 오래 사신다

 

그러고 보니 우리 네 식구

한 달에 한 번 밥 한 끼 같이 먹기 힘든

우리 집이 여전한 대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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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랑 생명사랑 시사랑 캠페인에 소개되었던 작품입니다.
캠페인 기간 : 2016년 12월 ~ 2017년 5월
방송일 2017 년 6 월 4 일 / 출연시인 : 이문재/허영자
출연 : 가수 홍대광, 피아니스트 소욘
공동주최 : 한국시인협회 KBS 제2라디오 <강서은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협찬 : 교보생명
방송 다시 듣기 : http://www.kbs.co.kr/radio/happyfm/nightkang/replay/2552780_1188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