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나태주 신달자 대한민국의 내노라 하는 대시인들이 절에서 시를 읊었다. 한 명도 모시기 어려운,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여럿이 자작시를 들려주고, 시학을 강의하고, 청중석에 앉아 시를 감상하고 박수쳤다. 생전 시인들을 부처님처럼 모시고 사랑했던 설악무산스님이 지켜보는 앞이어서 더 감동이 컸다.
한국시인협회(회장 유자효),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이사장 김종율), 설악 만해사상 실천선양회(이사장 권영민)가 주최하는 ‘한국 시인대회-한국시 미래 콘서트’, ‘시인들, 무산을 만나다’가 5월20일 오후 서울 성북구 무산선원(주지 선일스님)에서 열렸다. 200여명의 시인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콘서트는 지난 해 9월 문을 연 이래 5번 째다.
사찰에서 마련한 도시락과 다과로 점심 공양을 마친 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사회로 열린 콘서트는 무산스님 대표시 낭송, 가수 유현상의 노래에 이어 정현종선생의 문학강연과 시 낭송, 시인들의 자작시 낭송 순으로 이어졌다. 무산스님 시는 ‘절간 청개구리’, ‘산창을 열면’, ‘내 삶은 헛걸음’, ‘침목’,‘ 나의 삶’ 5편이 음악과 함께 선원에 울려 퍼졌다. 유현상 가수는 ‘너라서’ ‘여자야’ 두 곡을 불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권영민 신달자 유자효 3인이 꾸민 '시 콘서트'
정현종선생의 등장은 시인들을 들뜨게 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방문객’의 시인 정현종선생이 무대에 서서 시학을 강의하자 청중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무산선원에서 열리는 ‘한국 시인대회’가 갖는 무게와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장면이었다. 강의를 마친 정현종시인은 자작시 ‘이슬’을 낭송했다. “강물을 보세요 우리들의 피를/바람을 보세요 우리의 숨결을/ 흙을 보세요 우리들의 살을...” 노시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무산선원 옆 계곡을 넘어 삼청각으로 북악으로 흩어졌다.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와 한국학 연구소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맥켄 교수도 눈길을 끄는 인물이었다. 그는 창작시조집 '도시의 절간(urban temple)'을 펴내는 등 한국의 시조를 미국에 소개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학자다. 그 공로로 2004년 만해대상 학술부문 상을 수상했다. 당시 문학부문 황석영, 예술부문 임권택 영화감독이 수상했었다.
하버드대 맥켄 교수 우리말 시조 낭송 '눈길'
맥켄 교수는 백담사에서 무산스님을 만났을 당시, 스님도 설악산도 기가 아주 센 느낌을 받았다며 “스님이 나에게 기를 받아라 하셨다”고 말해 좌중이 박수 치며 웃었다. 맥켄교수는 무산스님의 시 ‘아득한 성자’를 우리 말로 낭송하고 한글로 쓴 자작시도 들려주었다.
120년 된 무산선원 우물에 반한 나태주 시인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 부터 시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인물은 나태주시인이었다. 무산선원 곳곳을 다니며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시인은 120년 된 우물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연중 물이 끊기지 않고 솟아나며 마셔도 된다고 했더니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마시더니 “참 맛있다”며 웃었다. 무대에 올라 자작시,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를 힘들어하는 사람을 달래 듯 차분한 목소리로 낭송했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낭송을 마치자 객석에는 감탄과 함께 박수가 울려 퍼졌다.
나태주시인은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자로 무산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서울대에 진학한 시인의 딸은 아르바이트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고된 학창생활을 보냈는데, 어느 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장학금을 보내왔다. 덕분에 그는 편히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장학금을 보낸 인물이 무산스님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시간이 한 참 지난 뒤였다. 불교문학상 수상금이 적다고 생각한 스님이 시인의 딸이 문학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졸업 때 까지 장학금으로 보상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어느 시인협회도, 언론사도, 정치인도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최고의 무대를 장식한 주역들이 있다. 국문학의 거장 권영민 전 서울대 교수, 예술원 회원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시인이다.
일제부터 북한 까지 망라하는 현대한국 문학 전반을 통찰했으며, 미국에 한국문학을 알렸던, 국문학계의 거장 권영민교수의 연구 저술을 ‘허망한 그물질’이라는 한 마디로 정신을 번쩍 뜨이게 했다는 무산스님. 이후 권교수는 스님의 모든 시와 시조를 한데 모아 <조오현문학전집> ‘적멸을 위하여’를 엮는 등 문학으로 스님과 일체가 되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1년간 한국문학을 강의할 때 스님의 천거로 현대불교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선시(禪詩)라며 극찬했던 뉴욕주립대의 하인즈 펜클 교수가 스님의 영어 시조집 
마리아상 곁에 앉은 신달자 시인
신달자 시인은 종교가 가톨릭이다. 무산스님은 시인이 오랫동안 병간호하던 남편을 보낸 뒤 우울증에 걸려 힘겨워하는 중에 썼던 ‘저 거리의 암자’라는 시를 동안거 해제날 해제 법어 대신 들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3개월 수행 한 것 보다 이 시 한편이 더 불경에 가깝다.” 스님의 초청을 받은 신달자 시인이 보는 앞에서 였다. 절망에 빠져 있던 시인은 스님의 그 한마디에 힘을 얻었다. 스님은 ‘남암(南庵)이라는 법호를 주고 제자로 삼았다. “이제 한 줌 재로 남은 스님 앞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까?”며 울던 제자는 문학으로 스승의 유업을 잇는다.
방송 기자와 앵커로 유명한 유자효 시인은 1968년 불교신문 ’학 예 현상모집‘에 당선돼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만해축전 2회 때부터 입재식과 시상식 사회를 맡았던 유자효시인은 여전히 사회로 문학인들의 잔치를 이끈다. “내 생애 오현스님이라는 우리 시대 최대의 시승(詩僧)을 만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는 시인은 “부처 이후/무수한 부처들처럼/ 스님/ 이제 보셨나요/ 맞으신가요?” ’적멸-오현에게‘라는 시로 스님을 그리워했다.
설악 무산스님의 법명을 딴 무산선원은 스님이 생전 아끼고 후원했던 시인들이 스님을 그리워하고 시를 논하는 문학관이며 스님의 생전 가르침을 떠올리는 가람이다. 그림이 있는 사찰이며 미술관이지만 그 무엇도 아닐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성모 마리아상이 탑과 더불어 지키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절간‘이다. “몽땅 내 주는 것이 절집 할 일”이라던 스님의 가르침이 피어나는 서울의 설악이며 수렴동 계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