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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작가의 사랑 - 문정희
작성일자 2018-10-08
조회수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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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사랑

 

문정

 

여성 작가 여섯이 한방에 모여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하자고 한 밤

마른 입술을 오므리며

폴란드 시인이 말했어

사랑 이야기라면 당신들은 우선

유대인을 잊어서는 안돼! 오슈비엥침!

아우슈비츠를 알기전에 사랑을 말하는 것은

진정한 작가가 아니야

순간 모든 입을 다물고 말았어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새벽처럼

텅 빈 눈으로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어

 

멀리 두고 온 땅, 조국이라는 말만으로

괜히 눈물이 차올랐어

빌어먹을, 나는 진짜 시인인가 봐!

 

잘 알아, 하지만 작가가 언제까지

한 곳에 못 박혀 있을 수는 없어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인간을 더 깊이 써야 해

그리스 작가인지 터키 작가 말했어

애절한 근친과 죄와 폭력들

내 여권 속의 분단과 증오와 노란 리본들

검고 흰 살과 피 으깨어진 화상의 흔적을

남미와 아프리카와 유럽과 동아시아 작가가

한방에 모여 사랑을 이야기하자고 한 밤

 

내가 불쑥 말했어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

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

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

 

우리는 팬티를 벗었어

하지만 나는 끝내 벗지 못한 것 같아

눈만 뜨면 팬티를 들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

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

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

 

사랑은 참 어려워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 찰스 부코스키

   


위 시는 단순히 여성 작가들이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확장이 된다.

폴란드 시인이 오슈비엥침! 즉 아우슈비츠를 폴란드어로 말하면서 비극의 역사를 논한다.

이어서 문정희 시인은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팬티를 벗어야한다고 말한다.

팬티를 벗는다는 것은 관습의 허울을 벗는 의미로 읽힌다.

겹겹의 팬티를 벗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가 된다.

사랑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과정이며 결과이다.

그래서 시와 시인과 사랑의 혼연은 어렵고 지옥에서 온 개인 것이다.

상처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여성성과 폭력과 생명을 아우르는 태도로

독자로 하여금 폭넓은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시편이 절절하다.

- 박수빈